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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 나담]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적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nadamTV 2019.03.18

[낭송 / 나담]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꼴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nadamTV 2019.03.14

[낭송 / 나담] 자전1.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 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 소리를 걸어 놓으며 평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nadamTV 2019.03.11

[낭송 / 나담] 얼굴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꽃을 꽂고 산들 무엇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 언뜻 만나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nadamTV 2019.03.07

[낭송 / 나담]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nadamTV 2019.03.04